삼락동은 옛날 낙동강 동쪽 물길따라 길게 뻗은 모래톱 섬으로서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유도>로 나와있고 삼락이라는 기록은 없다.
행정단위는 양산군 좌이면 유두리로서 구포권에 속했는데 일제시대인 1914년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와 유두리가 되었다.
삼락의 지명을 군자삼락, 인생삼락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곳에 1935년 낙동강 제방을 쌓으면서 강쪽으로 많은 땅이 편입되어 긴 섬이 둑 안팎으로 갈라졌다.
양산군지에 보면 조선조 중엽 지금의 삼락동인 유도에는 김씨들이 최초로 들어와 갈대를 베어내고 땅을 갈아 농사를 지으면서 섬 주위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는데
후세에 이 정자나무 덕택으로 사람들이 홍수의 재난에서 살아 날 수 있었으므로 활인수, 활인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도라는 지명도 섬에서 자라던 나무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두리의 본동네는 <새(쇠)각당>과, 제방을 쌓고 활인수가 있던 <환방리 (고리방)> 지역이었고, 위쪽의 <솔뫼섬>과 아래쪽의 <오복섬>은 유두와 이어 지는 섬이었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낙동강이 삼차수로 흐르는 강서쪽에 출두도, 대저도, 덕두도, 소요저도가 있고 강 동쪽에 동두저포가 있는데 동쪽 머리 포구는 유도에 있던 나루터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포 <범방산>에서 발원한 <범방천>이 모라 운수천과 합류하여 샛강인 <유두강>이 되었는데 모라동, 덕포동과는 <멍에개(가포)>나루터에서 배로서 왕래하였고 낙동강
본류쪽 <진등뫼(잔등)>에서 김해 덕두로 왕래하는 나루터가 있었다. 옛날부터 유두리는 퇴적사질토로서 땅이 기름졌는데 제방 안쪽 둔치지대에 일제말기부터 우기를 피해 생산되는 딸기를
재배하였고 해방이후 1970년대까지 삼락 딸기밭은 봄철에 낙동강 제방을 찾는 부산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였다. 그래서 삼락동의 지명을 강상청풍(낙동강 위의 맑은 바람), 노전낙조(갈대밭의 저녁 노을),
누하표전(원두막 아래의 딸기밭)의 삼락으로 칭송하였다.
모라동에는 <운수사>라는 고찰이 있어 그 뒷산을 <운수산>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을 <운수천>이라고 부른다.
모라는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있었던 오랜 동네라는 것을 이곳에서 발견된 조개 무지 유적인 모라 패총이 증명해 주고 있다.
모라의 지명은 조선시대 동래부지에 사천면 상단 모라리와 뒤에 사상면 모라촌으로 나와 있다. 모라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이라는 우리말의 고래어인 <모라>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의 논고에 의하면 고대 사회 집회소의 명칭이 <마을>이며 이것이 촌락의 명칭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양서제이전 신라전에는 성을 일러
<건모라>로 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데 이는 <큰마을>이라는 뜻이므로 <모라>는 <마을>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모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산을 배경으로 저지대는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하여 쌓인 땅이므로 <모라>는 <몰개> <모래개>에서 유래하며 넓은 땅의 지명에 붙는 <라>와 함께 모래로 된 땅으로 <모라>가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조선시대, 사천면 상단이었던 사상의 지명도 <모래내>와 <모래땅(모라)>에 그 어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모라동의 저지대는 모리펄로서 물이 고인 웅덩이와 미나리깡,
갈밭으로 형성되어 1935년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인가가 없던 곳이었다.조선시대 사상지역에 제방을 쌓은 기록을 보면 <모라촌 뒤에 키 모양으로 석축을 하고, 같은동네 위의 주을산 일원과 산밑에 둑을 쌓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모라에 사람이 살았던 지역은 패총이 발견된 근처와 현재의 철도 동쪽 윗각당과 철도 서쪽 아랫각당이었다. 모라동이 역사적인 내력이 있는 고장이란 것은 운수사 사찰이 증명해 주고 있는데, 이곳에 남아 있는 2기의 부도탑은 조선시대의 귀중한 유물이다.
운수사를 따라 오르는 절곡 계곡은 물이 맑고 경관이 아름다워 <청류동천>이라 불렀는데 <큰골>과 <작은골>이 있고 서당너머 <서당골>, 못이 있는 <못골>,
고동바위의 전설이 있는 <고동바위골>, <문리골>에다 계곡 좌편은 <잿골>, 안쪽 골짜기는 <안골>등 많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운수천은 옛날 양산 구포와 동래 사상의 경계지점이었는데 구포의 사랑골로넘어가는 고개가 <어부랑고개>이며 수리가 살았던 <수리재고개>가 있다
덕포동에는 백양산 기슭에서 낙동강을 향하여 길게 뻗어 내린 곳에 바위 언덕이 있고 동·서 양쪽에 독산을 이룬 암구에 고목이 우거져 선경을 이룬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선이 내려온다는 전설이 깃든 강선대이다.
덕포동의 지명에는 이처럼 바위 언덕과 강선대가 있는 마을로서 옛날 배가 들어왔던 갯가의 뜻이 담겨 있다. 덕포의 원 이름은 <덕개>이며 덕은 <언덕>에서 따온 말로 언덕 끝에 배를 대는
포구로서 <덕포>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덕은 글자 뜻대로 크다는 뜻이 담겨 있어 동· 서 양쪽 강선대와 바위 언덕이 있는 이 일대가 옛날 배가 와서 닿을 수 있었던
큰 갯가 포구로서 <덕개>,<덕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덕포동의 지명이 공식 명칭으로 나타나기는 조선시대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의 각면원근도정에 보면 <사천면 상단 덕포리 거관문 34리>로 나와있다. 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삼각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덕포동과 괘법동의 경계를 이루는 하천이 <덕개천>인데 이를 <한내천>이라고도 하며 옛날 이곳 한내도랑은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소나무가
많았던 <솔베기천>은 현재의 한일 시멘트와 저온 창고 앞을 흐르던 도랑인데 이곳에서도 빨래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여기를 향해 넘어가는 고개를 <고개 넘게(넘어)>라고 한다.
옛날 이곳은 산이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장군이 가다가 칼로 산 입구를 끊어서 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덕포동의 산쪽에는 이곳의 토박이인 황씨들의 논이 있는 <황산골>이 있고, 산이 크고 너른 <큰 골>, 물이 많고 소태나무가 있었던 <소태골>이 있었으며 병풍처럼 서 있는 <병풍등>,
약수암 밑에 그림처럼 멋진 <기림산(길음산)>이 있다. 옛날 배가 들어 왔던 상강선대에는 조선시대 이 고장에 제방을 쌓아서 홍수의 피해를 막아 주었던 동래부사 세분의 축제 헤민비가
있는데 둑을 쌓을때 제방따라 대나무를 심었다고 이를 <대밭둘(둑)> 또는 <10리줄대밭>이라 하였다고 한다.
괘법동은 북쪽으로 덕포동, 삼락동, 남쪽으로 감전동, 동쪽으로 주례동에 둘러 쌓여 있는 사상지역의 중심 마을이다.
괘법동이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시대 이곳의 <괘내리>와 <창법리>를 합쳐서 생긴 이름이다. 감현천은 덕포동과 삼락동과 경계를
하고 동남쪽은 주례동과 감전동을 경계하여 괘내, 동괘, 서괘마을이 합쳐 괘법동이 되었다.
괘내천 물은 동네 배산인 삼각산 아래 현재 신라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가내골(개내골)> 골짜기에 물방앗간이 있었던
<물방산 (물뱅이산)> <수용골(물방앗골)>에서 흘러 내려 현재의 사상역 앞을 지나 옛날 사상 명진학교 앞의 목을 거쳐 감전동
쪽으로 흘러 낙동대교의 북쪽장인도 배수문을 거쳐 현재의 낙동대교가 있는 곳으로 흘러 내렸다. 괘내라는 지명은 옛날 마을 앞
나루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갯가의 동네요, 냇물이 괴어 있는 동네라서 <괸내>였는데 <괘내>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창법리는 1872년(고종8년) 제작된 경상도 지도에 나오는 사상면 사창이 있었던 <창나루>를 말한다.
사창이란, 조선시대 민가가 여럿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룬 공동체로 하여금 창을 설치하여 곡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해주고 다음 수확때 환곡하게 하는 제도로서 이 창고가 있었던 곳이 바로 창법리, 창나루터였던 것이다.
괘내리와 창법리는 예로부터 사상지역의 중심지로서 면모를 과시해 왔다. 괘내라는 지명에서 <괘>는 <걸다, 달다, 게시하다>는 뜻이 있으며
<내>는 <냇가 동네>라는 뜻이 담겨 있어 이곳이 행정의 중심지로서 게시하는 곳이므로 괘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사상의 본거리로서 사상지역 8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회산팔경대>가 있었고 임진왜란때 전사한 분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연구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사상면사무소와 사상면 사창이 있었으며, 구한말 민족 교육기관인 <사립명진학교>도 여기에서 설립 되었고,
경부선 <사상역>이 있고, 부산 신발의 원조인 신라고무공업사가 설립되었으며, 뒤에 국제상사가 들어서 세계적인 신발산업의 원산지가 된 곳이다.
또한 현재 이곳에는 서부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으며 괘내천의 발원지인 수용골에는 신라대학교가 들어서 있어 옛날부터 중심부로서 깃발을 걸고 있는 냇가 마을임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감전동은 오랜 옛날 낙동강 하류와 하구였던 사상지역 내륙 깊숙히 바닷물이 들어 왔던 지역으로서 토사가 퇴적하여
생긴 모래톱 섬이었는데 강에서 북쪽은 <유도>였고 남쪽으로<자인도>가 있었으며 안쪽으로 <감도>가 위치하였던 곳이다.
섬이었던 감도는 조선시대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여름철이 되면 논밭이 홍수의 피해를 입었던 곳인데 1788년 사상지역에 제방을
쌓아 주었던 이경일 동래부사의 공덕이 새겨진 축제혜민비에는 <감동도일원이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내고 좌우로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의 사천면 상단에는 감동의 기록이 없다. 이때는 감동은 높은 지대에서 농사를 짓기는 했으나 대부분 저습지와 갈밭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04년에 기록된 문서에는 사상면 감동과 서전리가 나와 있는데 근세에와서 호구가 늘면서 독립된 동네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이나 토지문서에 나오는 <감도>, <감동도>라는 지명은 신의 뜻이 담긴 신성한 땅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감전동은 옛날 바닷물이 들어 왔던 곳으로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퇴적된 비옥한 섬이라 <감도>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한다. 그리고,
감전동의 서쪽 낙동강변에는 <서발>이라는 곳이 있었다. 서발은 강물에 의한 유사의 퇴적으로 모래톱의 생성과 변동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
생긴 뻘이라는 뜻으로 새뻘이 서발이 되었거나 서쪽 뻘이라서 서발이라 하였을 것이며 그것이 논밭으로 변하여 서전리가 되었을 것이다. 감전동은1914년 감동과 서전을 합쳐서 생긴 지명이다.
감전동의 지명중에 <자인도>가 있는데 이섬은 갈밭지대가 많아 집이 한두채밖에 없었던 섬으로서 강변 모래펄에는 재첩이 많이 잡혔다고 한다.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 나오는 <강자도>도 학장동의 건너섬인 <대동도>와 함께 감도와 이어진 섬으로 보인다. 감전동의 이색적인 지명중에는
<포푸라마치>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해방지를 위한 토종 포푸라 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강수로를 통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서감전 입구에는 신선한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포푸라나무 밑에 몇집 있었는데 이곳을 <포푸라마치>라 불렀고 오늘날에도 이지역은 주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주례동은 예로부터 아래쪽 큰 동네인 주례본동과 고갯길 쪽의 작은동네인 냉정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나와있고 1872년 제작한 경상도 지도에는
사상면 주례촌과 냉정촌이 나와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는 주례의 하천인 동천과 남천, 그리고 사목포 나루터가 기재되어 있다.
주례의 본 동네 앞에 물길이 합쳐지는 곳을 <냇바닥>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강물이 들어와서 나루터가 있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솔밭이라고 했으며, 주례마을의 중심지는 <골새>였고 <동녘>에도 인가가 있었다. 주례동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고갯길 중턱에 있던 <냉정>의 약수였다.
1714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 13도의 물 중에서 이름난 약수로서 냉정의 물을 꼽고 있다.
주례동 지명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사상지역에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주례는 옛날 한 마을의 농사를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농악을 울리면서 일을 해내었던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한자로 표기하여 <주례>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주례가 지형적인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으로서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로서 <두리>와 동평현에서
주례로 나와야 앞이 트인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르>를 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어인 <두레, 두루, 두리, 드르>등에서 주례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주례동은 이처럼 낙동강변에서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요지였기 때문에 냉정 산 위쪽으로 있던 성터는 학장동의 학성과 연결된 목장성인데 방어성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성터는 해방이후까지 학장동에서 냉정, 개금을 거쳐 가야공원까지 남아 있었는데 6·25때 미군이 하야리아 부대를 조성하면서 성벽의 돌을 옮겨가 버려 성터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터로 난 길을 따라 가야, 개금, 주례사람들이 냉정 뒤쪽 호랑이굴이 있었다는 오지봉의 구덕재를 넘어 대신동으로 내왕했다.
그런데 주례에 있던 사목포나루터는 가축을 취급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서 목장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주례동의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철로를 따라 구도로가 있었는데 냉정 고갯길 쪽으로 새도로가 나면서 지난날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나아가는 국도가 되었던 것이다. 옛 성터가 있던 산중턱에는 현재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이 들어서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학장동은 마을 앞의 학장천 물이 흘러내리던 옛날 모래펄 지역인 서북쪽 저지대와 동남쪽으로 구덕고개를 끼고 산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다.
1967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유적을 답사할 때 도로변에서 기원을 전 후한 김해문화기에 해당되는 토기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패총유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옛날 바닷물이 만입해 들어왔던 사상지역에 어패류가 풍부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임을 말해준다.
학장동의 지명은 옛 성터였던 <학성>과 옛 장터였던 <장문평>에서 유래한다. 동래부지에 목장성이 있었다는 기록에 보면
<엄광산 기슭 강변으로 부터 부산범천 산장 15리까지>로 나와 있다. 목장성인 학성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방어성으로 쌓았을 것인데 후세에 이를 수축하여 목장성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기도 한다.
<학성>이란 지명은 사상팔경의 <평사낙안>처럼 이곳 강변의 모래펄에 학처럼 귀한 새들이 찾아오는 풍경을 보고 붙여 졌을 것으로
보이며 <장문평>이란 지명은 옛날 <장시, 장터>란 뜻으로 이 마을에서는 <장문안> 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구덕고개로 사람의 내왕이
있었고 고갯배도 들어왔을 것이며 목축을 하던 동네라서 농 ·수산물과 가축의 유통을 위한 조석시로서 장터가 열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장동의 명소로는 예로부터 이름난 구덕령 고갯길이 있다. 이곳 구덕 골짜기에는 옛날 숲이 많이 우거져 여우가 많이 나와서
야시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구덕 냇거랑>이다.
구덕천의 바위 틈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예로부터 물이 차기로 소문이 났으며 물이 뱅뱅 돌만큼 깊은 <가메우소>라는 웅덩이도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구덕 골짜기 산에는 명당터가 9곳있는데 이 중에 현재 4곳에는 묘가 들어섰고 5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학장동에 전해오는 지명중에는 <홍깨>가 있는데 학장에서 주례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말하며 둑길 너머 저지대에는 옛날 <대동도>라는 섬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엄광산의 서쪽 강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엄궁동의 원 지명은 산 이름따라 엄광리였다.
엄광산은 <엄비치산>으로서 해가 오랫동안 비치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그 아래 마을이 엄광리가 된 것이다.
엄광이란 지명에는 옛날 이곳이 신을 섬기고 받들던 성스러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1914년 일제시대 산이 활처럼 생겼다고 엄궁리로 개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옛날 엄광리의 강변이었던 현 농산물 유통단지 앞쪽으로 서감전의 <자인도>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섬을 엄궁사람들은 물 건너
있다고 <건너섬>이라고 했다. 그리고 배가 와서 닿았던 엄궁선창에는 상선들이 들어와 객주마당이 형성되었고 주로 선창가 주변에 사람이 살았는데 이곳에는 연자방아도 있었다고 한다.
강변에는 갈대 밭으로 된 <쇠갈밭섬>이 있었는데 그 섬자리의 일부는 강으로 편입되고 일부는 육지로서 강변도로로 변하였다.
이곳의 산쪽에는 전설의 <장군샘>이 있었는데 이 물을 먹으면서 작은 산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하단으로 넘어가는 길은
산을 깎아 지금의 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옛날에는 산복으로 난 고갯길로 오르내려야 했다. 그리고 사상쪽으로는 모래둑길로
다녔고 일제때에는 1935년에 생긴 낙동강 제방길로 구포까지 걸어 다녔다. 그만큼 엄궁은 교통이 불편한 마을이었다
엄궁에는 잉어와 민물장어, 그리고 숭어가 많이 잡혔는데 이곳의 최고 명물은 재첩이었다. 강 하구지역인 엄궁강변 모래펄에는
재첩의 수확이 특히 많았는데 농사도 별로 없던 이 마을의 부녀자들은 거의 모두가 재첩국 장사를 하였다. 이들은 밤새 고아서 만든
재첩국을 양철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걸어서 새벽 어두운 밤길에 마을을 떠나 구덕령을 넘어 대신동으로 가거나 하단을 돌아 괴정을 거쳐
대티고개를 넘어 부민동, 아미동등 시내까지 거리를 누비면서 큰소리로 <째찌꾹(재첩국) 사이소>라고 외치며 다녔다.
이처럼 재첩국은 과거 부산사람들이 매일 같이 듣던 잠결의 첫소리였고 동시에 기상을 알리는 신호처럼 된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는 재첩국아줌마의 소리가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어주었다.
엄궁동에는 일제시대부터 8·15 해방 이후까지 양어장이 있어 붕어낚시의 명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 피난
시절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한적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하여 뒤에 이 마을을 <평화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낙동 강변은 철새도래지로서 갈대가 우거진 평화롭고 낭만적인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일부 중소 공장들이 들어섰고 산쪽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