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명 조식 선생의 생애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1501∼1572)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南冥)이며 조선조 연산군 7년(1501)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 (현재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承文院判校),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忠順衛 菊의 딸) 사이의 삼남 오녀중 이남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가판현(三嘉板峴)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선생의 외가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아버지가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외임(外任)에 나아가자 잠시 거기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의방(醫方), 수학(數學), 궁마(弓馬), 진법(陣法)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익혔다. 그리고 18세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이때에 유서(儒書) 외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20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일, 이등으로 급제했다. 남명(南冥)은 고문(古文) 에 능하여 시문(時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試官)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기 까지 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叔父)인 언경가(彦慶家)가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삼가(三嘉)에 장사지내고 삼년간 시묘(侍墓)생활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들의 고초(苦楚)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남명사상(南冥思想)속에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한 것은 이 때 생민의 어려움을 실제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49세 때인 1549년 18년간 학문기반을 닦던 김해를 떠나 다시 고향인 토동(兎洞)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한편으로는 후진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처사(處士)로서 언론을 발(發)하여 국정을 비판하였다. 사림(士林 )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이를 안 조정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나 모두 사퇴했던 것이다.
61세가 되자 선생 일생의 마지막 도장(道場)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德山)의 사윤동(絲綸洞) 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고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과 도덕과 인격과 정신,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인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과연 선생의 일생은 이 산천재(山天齋)에서의 만년(晩年 61∼72)을 잘 장식함으로써 여기서 길러진 제자들이 조선 선조시대의 정치, 학술계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었고, 특히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왜토적(抗倭討敵)한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대부분 선생 문하(門下)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72세(1572)되던해 2월 8일 천수를 다하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矢川面) 사윤동(絲綸洞)에서 조용히 운명(殞命)하였다. 부문(訃聞)이 발(發)하자 조정에서는 제물(祭物)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다.
영암사지
황매산 남쪽 기슭에서 동-서축으로 배치된 산지가람이다. 크게 보면 3곳의 축대가 남아 있는데 중문터에서 회랑 터로 이어지는 곳과 금당 터 앞의 긴 축대, 금당 터 옆과 뒤를 두르고 있는 낮은 석축으로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쌓은 모양이다. 금당 터 앞의 축대는 한 가운데를 성벽의 치(雉)처럼 전면으로 튀어나와 있고 그 위에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이 놓여 있다. 이 축대 좌우에는 금당에 이르는 돌계단이 있는데,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깎은 무지개 다리 모양이며, 6단을 파냈다. 금당지보다 한 단 낮은 마당에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80호)이 있다.
금당지의 기단은 화강석, 지대석, 면석, 갑석을 비교적 잘 갖춘 양호한 모양으로 사방에 계단이 한 개씩 남아 있다. 정면 계단의 소맷돌에는 용, 좌우측면 계단 소맷돌에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으며, 뒷면을 제외한 삼면의 기단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나머지 기단 면석에는 안상(眼象) 문양을 새겨 놓았다.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초석이 두 줄로 놓여 있다. 바깥쪽의 낮은 초석이 오래된 것이고, 안쪽의 높은 초석이 후대의 것이라 판단되므로 금당이 두 번 이상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에는 H자형으로 짜여진 불상 지대석이 드러나 있다. 불상 지대석은 8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고 표면에 팔부중상이 안상 안에 모각되었다. 금당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50m 지점에 양쪽으로 귀부를 두고 그 사이에 또 하나의 동향한 독립된 건물지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1984년 발굴조사 당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편(瓦片)과 토기편, 금동여래 입상 등이 발견되었다.
건물지의 초석이나 축대 등이 대부분 파손되어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드물지만 일반사찰에서는 보긴 힘든 것이고 경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대찰(大刹)이자 통일신라 말 고려 초 산지가람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합천영상테마파크
<태극기 휘날리며(2004)>,<도둑들(2011)>,<변호인(2013)>,<암살(2014)>,<택시운전사(2016)> 등의 천만 관객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 외에 <인천상륙작전(2016)>, <밀정(2016)>, <박열(2017)> 등을 포함한 190여 편의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 작품이 촬영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다.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울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영상테마추억길’은 옛 서울의 향수를 느끼며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합천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중장년층에게는 아련한 옛 서울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요코스로는 <가호역(매표소)>부터 시작해서 <서울1945세트장>, <총독부>, <포화속으로 세트장>, <대흥극장>, <경성역>, <에덴의동쪽 세트장>, <마이웨이세트장> 순이다. 어른 걸음으로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면 천천히 둘러보며 옛 서울의 추억의 향수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역사 책이나 역사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사저로 사용했던 경교장,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하던 이화장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코스 순서대로 걷다보면,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과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보여서 전쟁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또 다른 건물 한 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조선 총독부 건물과 종로경찰서 건물을 보면서 암울했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기도 하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1960년대 서울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서울역과 용산역 사이에 있는 남영역 철교와 국도극장, 한국은행 등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코스 중 하나인 청와대 세트장은 영상테마파크 정문 기준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2015년 10월에 완공된 청와대 세트장 부지는 청와대라는 명칭에 걸맞은 명당 중의 명당이다. 전국 십대 명산인 황매산과 가야산이 품고 있다. 실재로 청와대 세트장이 있는 용주면 가호리 일원은 매년 각종 고시에 3~4 명을 꾸준히 배출하는 등 풍수지리학적으로도 특별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청와대 세트장은 실제 청와대 크기를 축소해 설계되었으며, 잔디마당, 정원, 편의시설 등이 조성되어 있고, 건축면적 2,068m2(제곱미터), 지상 2층으로 세워졌다. 1층에는 회의실 및 다목적 시설로 사용되는 세종실을 비롯하여 그 외 공간은 다양한 체험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청와대 세트장 2층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은 이곳의 가장 인기있는 장소이다. 이곳의 방문객들은 대통령 집무실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보고, 대통령처럼 집무실에 앉아 멋진 포즈를 잡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미래 대통령의 꿈을 키워볼 수 있다.
황우산 연호사와 함벽루
합천 연호사는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동에 있다. 대야성 아래에 있는 연호사 뒤로는 황우산이 솟아 있으며,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합천읍에 있는 군청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에 중건하여 여려 차례 중수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이황, 조식, 송시열의 글이 있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 팔경 중 제5경으로 절벽을 등지고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앞으로는 푸른 황강이 흐르고 있다. 산을 뒤로하고 누각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으며, 비 오는 날에는 누각 처마에서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달빛을 받은 합천 황강의 푸름이 절경을 자랑하는 곳에 말없이 강물에 그 모습을 비추고 세상의 온갖 번뇌망상은 흐르는 물에 흘려버리고 부처님의 불법만 고이 지키고 있는 연호사(烟湖寺).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진 연호사는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신라 장병 2천여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
신라의 김품석의 설화가 있는 곳
신라의 김품석의 설화가 있는 곳
642년 백제의 일만 대군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을 때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이끄는 신라군은 내부 분란으로 위기에 처하고 항복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김품석은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 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데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 하리오”라며 장병 2,000여 명과 함께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바로 이 전투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처자, 그리고 신라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643년 와우 선사가 연호사를 세운 것이라 한다. 신라의 대야성 패배는 비록 쓰라렸지만, 6년 후 김유신은 백제군을 대파하였고, 김춘추는 대당 외교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한 의미 있는 패배였다.
푸른 황강에 패전으로 물든 붉은 핏물은 대나무의 곧음으로 안타깝게 죽은 영혼들을 지극정성으로 위로하였기에 지금의 황강이 다시 푸름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 연호사 밑에는 푸름이 젖어드는 곳이라는 하여 지어진 함벽루(涵碧樓)라는 누각이 있다.
함벽루는 핏빛의 역사와는 다르게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함벽루는 진주 촉석루나 밀양 영남루보다 더 오래된 정자로 누각 처마의 빗물이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게끔 지어져 누마루에 앉으며 배를 타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강물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유히 흐르고 역사의 사연들만이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듯 부처님이 큰 가르침은 속인들에게 흐르는 물과 같이 한 곳에 잡아 두지 못하고 멀어져 가기만 한다.
연호사 법당에 앉아 황강에 비친 달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들리는 풍경소리에 절개를 지키며 죽어간 영혼들의 아우성이 들리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