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사상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을 전후한 2000여년전으로 보인다.
이는 모라동과 학장동의 패총 유적을 통하여 김해문화기의 김해식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의 낙동강 하구는 패총이 남겨진 위치가 모두 언덕위인 점으로 보아 넓은 바다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무렵 동래에는 독로국이 있었으므로 낙동강 하구의 동안지역인 사상은 이 세력하에 있었다. 이때는 삼한시대로 변한에 속하였으며 변한 12국중 독로국에 속해 있는 지역이었다. 독로국의 이름은 기원 3세기 중국에서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거칠산국, 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에는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 기록되어 있다. 거칠산이란 이름은 거칠뫼(황령산)에서 온 것이며, 신라 탈해왕(A.D. 57∼79)때 신라에 병합되었고, 신라 지증왕(A.D. 505년)에 거칠산군이 되었다. 거칠산군에는 두개의 속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갑화량곡 현이며 또 하나는 당감동 근처에 그 치소를 갖고 있던 대증현이다.
갑화량곡현은 뒤에 기장현이 되었고 대증현은 동평현이 되었으니 사상은 동평 현에 속했다. 그 뒤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이제까지의 행정조직 체계를 정리하고 주, 군, 현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쳤으니 그 9주중의 하나가 양주이다. 양주에 12군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동래군이며 여기에는 동평현과 기장현의 두현이 딸렸으니 사상은 구포, 주례, 개금지대에 이어진 지역으로 동평현에 속했다. 고려 성종2년(983)에 지방관제가 반포되었는데, 전국에 12목을 두었다. 이때의 사상은 상주목에 속해 있었다.
성종14년(995) 12목 제도를 고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종정의 12목은 12주로 고쳤는데 사상은 영동도 양주군 동평현에 속해 있었다.
현종 13년(1021) 5도 양계제도의 정착으로 사상지역은 경상도 양산군 동평현에 속했다. 이후 조선초기까지 사상지역은 양산군 동평현에 속해 있었으나 조선 태종 5년(1405)에 동래 현의 속현이 되었고, 태종 9년(1409)에 다시 양산에 속하였다가 세종10년(1428) 에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으며 그후 속현제도의 폐지로 동래현에 완전 흡수 되었고, 명종 2년(1547) 동래현이 동래부로 승격되었다.
영조 16년(1740)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여 동래부 관할 행정구역은 읍내면, 동면, 남촌면, 동평면, 사천면, 서면, 북면의 7개면으로 되어 있었으며 사상지역은 사천면에 속해 있었다. 또한 동래부 사천면 상단지역으로서 주례리, 모라리, 괘내리, 덕포리, 장문리, 엄광리의 6개리가 나오는데 사천면은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었고 그 뒤에 상단은 사상면, 하단은 사하면으로 불렀다.
사상면에는 냉정촌, 주례촌, 감동촌, 괘내촌, 덕포촌, 모라촌의 6개촌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면사무소는 괘내리 괘내마을에 있었다.
1914. 03. 01 부·군 폐합으로 동래군 사상면이 되었으며
1963. 01. 01 부산직할시 승격시 면사무소가 폐지되고 부산진구 사상출장소가 되었다가
1975. 10. 01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고
1978. 02. 15 북구가 설치되었으며
1995. 03. 01 북구관할에 있던 삼락동, 모라동, 덕포동, 괘법동, 감전동, 주례동, 학장동, 엄궁동 지역을 분할하여 사상구로 발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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